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열린광장] 아름다운 나라 이름 ‘코리아’

모든 달마다 그 달에 일어난 좋거나 나쁜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역사적으로 8월에도 일들이 많았다. 그 중 하나가 최초로 원자탄이 떨어진 일이다.  1945년 8월6일 미국의 B29 폭격기가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했고 이로 인해 1945년 8월15일 일왕은 항복을 선언했으며 한국은 광복의 기쁨을 누렸다.     그런데 광복의 가쁨도 참시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의 침략으로 전쟁이 발발했고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그리고 한국에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그무렵 나는 서울  낙산 위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에서 이른바 ‘하우스 보이’로 일했다.  하루는 미군 상사가 이런 질문을 했다.  “Hey yoon!  What is the Korean name of your country?”  난데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했다. 이게 무슨 물음일까?  ‘코리안 네임?’ 이라니 참 엉뚱하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물었다.  “Korean name?  What do you mean by that?”  그랬더니 한국 사람들은 국적을 말할 때 모두 ‘코리아’ 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낱말은 영어지 한국말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나는 ‘한국’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북쪽에 있는 사람들도 다 ‘한국’이라고 하느냐고 되물었다. 북쪽에서는 ‘조선’ 이라고 부른다고 했더니 그것 참 재미있는 나라 이름이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우리나라의 국호는 ‘대한민국’ 이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코리아’ 라고 부른다. 코라아는 고려에서 유래된 것이라 흥미롭다.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는 성정이 안정되지 못하고 일관된 철학이 없어  국호와 도읍을 자주 바궜다. 영토가 넓어지자 건국 당시 국호인 후고구려와 도읍인 송도를 버리고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도읍도 철원으로 옮겼다. 정치가 안정되자 국호는 다시 태봉으로 바꿨다.   이 때 후삼국의 새 지도자가 탄생했다.  태조 왕건이다. 왕건은 궁예를 물리치고  나라를 세웠는데 국호를 고려(高麗)라고 지었다. 일설에 의하면 왕건의 부친 왕융이 국호로 고구려를 권유하자 왕건은 나라 이름을 뜻하는 구(句)자를 빼고 고려로 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이란 이름은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고려’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이다.  유능한 지도자들과 성실한 국민이 있는 나라 ‘고려 (Korea)’, 곧 대한민국이다.  윤경중 / 연세목회자회 증경목사열린광장 코리아 나라 나라 이름 도읍도 철원 korean name

2023-08-21

[수필] 오렌지

내가 오렌지를 처음 접한 것은 충청도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으니 지금부터 꼭 60년 전 일이다. 도로를 통행하는 자동차라곤 하루 종일 3~4대가 고작인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그 날도 동네 또래 너댓명이 어울려 하교하던 길에 신작로에 멈추어 있는 미군 트럭을 보았다. 병사들이 펑크 난 타이어를 교체하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미국인들이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멀찍이 떨어져 구경하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뭐라고 우리는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시시덕거리고 떠들면서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당시 우리는 까까중머리에 모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책가방이 아닌 책보를 둘러멘 우리의 모습이 신기하였으리라…. 콧물 닦는 손수건을 앞 고름에 달고 다니면서도 누우런 콧물을 훌쩍거리는 모습이 이상하였을지 모른다.     그들은 뭔가 먹고 있었다. 타이어를 다 고치고 떠나면서 먹고 있던 것 한 개를 우리 쪽으로 던졌는데 그것이 그만 도랑에 떨어져 물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떠내려가는 그것을 줍기 위해 온 힘을 다해서 뛰었다. 우리 중에 키가 제일 큰 꺽다리가 먼저 도착하여 집어 들더니 “어이쿠! 폭탄이다~”라며 소스라치게 놀라 냅다 집어 던지고는 줄행랑쳤다. 나는 내 주먹보다도 더 큰 그것을 집어서 집에 돌아왔다.     왠지 나는 개선 장군이 된 기분이었다. 의기양양하게 집에 돌아온 나는 큰형과 마당에 콩다발을 깔아 놓고 도리깨질을 하시던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나에게서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으신 어머니는  “애야! 이건 폭탄이 아니고 미깡이여… 왜정때 읍내 우체국장 딸이었던 요시꼬가 가끔 까먹던 것하고 똑같은 거여…” “아이고! 똑똑헌 내 새끼…” 어머니는 품 안에 나를 안으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어머니는 그것의 껍질을 쉽게 벗기고 쪼개어 우리 5남매에게 두쪽씩 나누어 주셨다. 그것이 입에 들어가는 순간 새콤달콤, 입 안에서 녹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맛있는 것을 그때까지 먹어 본 적이 없었다. 하늘 나라에서나 맛볼 수 있을 것 같은 신비스런 맛이었다. 새콤달콤하고 단단한 노란 껍질을 갖고 있는 그 신비한 과일을 먹어 본 이후로 나는 미국을 좋아하고 동경하게 되었다.     그 후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했다. 중학교 3학년 때 국어 시간이었다. 선생님께서 “오늘은 여러분들의 국가 선호도를 조사하고자 한다. 내가 나라 이름을 부르겠다. 호명하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좋았겠다’ 라는 생각이 들면 손을 들어라. 모두 눈을 감고 절대로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아서는 안된다.”  선생님은 프랑스, 덴마크, 스위스, 독일 등 유럽국가를 먼저 호명했다. 이윽고 “미국”을 호명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씩씩하게 손을 번쩍 들었다.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고 몰래 주위를 살폈더니 나 혼자만 손을 든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을 호명했는데 살며시 훔쳐보니 반 학생 거의 모두가 손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창피하지 않았다. 평소 미국을 ‘은혜의 나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미국을 막연히 좋아했지만 성장하면서 미국은 한국의 우호국을 뛰어넘어 피를 나눈 동맹국이라는 것을 배웠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카사키 등 두 곳에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과 일제 강점 36년을 종식하고 우리에게 해방을 안겨준 미국이 아니던가. 6·25 한국전쟁때는 3년 동안 3만6000명이 넘는 미군의 희생을 감수하고 그 참혹한 전쟁에서 우리를 지켜 준 나라가 미국이었다. 종전 후 우리 나라를 무상 원조 국가로 지정하여 옥수수 가루와 우윳가루, 치즈 등을 배급해주고 배곯고 있는 우리의 허기진 배를 채워 준 미국이 아니었던가. 춥고 배고팠던 어린 시절, 주말에 외출 나온 미군을 보면 “헬로우! 깁미 초콜렛”을 외치며 쫓아다녔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한국 국민이 미국에 호의적인 것은 사대주의(事大主義)가 아니다. 한때는 모국에서 일부 젊은이들이 “양키 고 홈!(Yankee, Go home!)”을 외치며 시위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오늘날 이 정도 살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한 번쯤 돌이켜 보았으면 좋으련만…     맥아더 사령관은 종전 후 “초토화된 한국이 전화(戰禍)를 복구하자면 족히 100년은 걸릴 것이다”라고 했다지 않는가? 미국이 ‘은혜의 나라’ 임에는 틀림이 없다. 지금도 주한미군이 한국에서 70년이 넘도록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자유대한을 지켜주고 있으니 말이다.   미국에 이민 온 후 나는 옛 추억을 그리며 오렌지를 자주 사서 먹는다. 플로리다산 오렌지도 먹어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은 껍질이 얇아서 벗기기가 힘들었다. 캘리포니아산은 껍질이 더 두껍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 껍질을 쉽게 벗기셨던 것이다. 어렸을 적 미군이 우리에게 던져 준 그 오렌지는 틀림없이 캘리포니아산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캘리포니아 하늘 아래에서 지금 20년 가까이 숨을 쉬고 있다. 이진용 / 수필가수필 오렌지 하늘 나라 나라 이름 우리 나라

2023-02-02

[삶의 뜨락에서] 춥고 어두우면서도 밝은 나라

지구는 둥글고 해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 이 엄연한 진실을 확인하고 체험하는 데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서른에 뉴욕으로 온 나는 아침이면 해가 뜨고, 저녁에 노을이 진 후 어두워지고, 긴 겨울이 지나면 대지가 녹는 봄이 오고, 여름이 무척 덥고, 가을에 낙엽이 지는 것을 자연의 이치로 생각했다. 우리와 다른 기후에 사는 사람을 미쳐 생각하지 못했다.     1988년 모스크바를 여행하면서 깜짝 놀랐다. 지금처럼 5월 중순이었는데 저녁 9시가 넘어서까지 크렘린 광장은 밝았고 사람들로 가득했다. 모스크바가 뉴욕보다 훨씬 북쪽에 있다는 사실을 잊고 그저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이때부터 지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5년 전 알래스카의 데날리 국립공원을 여행했다. 여름이었는데도 무척 춥고 바람이 강했고 밤 10시경까지 환했다. 그들은 여기를 ‘극한의 땅’이라고 말했다. 그 후 몇 년 후 남쪽 극한의 땅, 아마존을 여행했다. 겨울이었는데 무덥고, 밤이 짧았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 에콰도르를 찾았다. 이 나라 이름은 적도(Equator)에서 유래되었다. 적도가 가까워 1월인데도 무덥고 밤 11시까지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그리고 적도에 발을 디뎠다. 마추픽추 잉카 유적을 견문하기 위해 페루여행 길에 수도 리마에 있는 적도 관측소를 찾았다. 이곳은 일 년 내내 같은 시간에 해가 뜨고 진다. 밤낮의 길이는 항상 같아(엄밀하게 말하면 낮이 14분 길다), 사람들은 시계를 안 봐도 대충 몇 시쯤인지 짐작한다. 페루에서 해발 1만4000피트, 티티카카 호수를 찾았다. 여기서 고도가 사람과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실감했다. 이곳은 산소가 부족해 옥수수가 잘 자라지 않고, 나무도 작은 것밖에 없었다. 호수의 물고기가 작았다. 산소 부족으로 큰 고기는 생존할 수 없다. 수백 년 전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 와 광산에 투입했더니 호흡 장애로 하나둘 쓰러졌다. 이들을 바닷가 농장에 내려보냈더니 모두 일을 잘했다고 한다. 여행자 중에도 고산병으로 코피를 쏟는 사람이 있었다.     아이슬란드는 뉴욕에서 비행기로 5시간 정도 걸린다. 아일랜드보다 조금 가까운 북유럽, 대서양에 떠 있는 뉴저지 면적의 섬나라다. 인구는 35만, 플러싱·베이사이드 인구의 3배 정도다. 그러나 여행을 하면 온 땅이 텅텅 비어 있어선지 무한정 넓게 느껴진다. 집이 없고, 농작물도 자라지 않은 버려진 땅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집도 가구가 없으면 실제보다 넓어 보이지 않는가. 아이슬란드 북쪽은 북극에서 아주 가깝다. 바로 위에 있는 그린란드(덴마크령) 위가 북극(Artic), 이곳은 여름은 항상 낮, 겨울에는 온종일 밤이다.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커자비그(Reykjavik)에서 북극까지는 약 500마일, 5월 중순 자정 경에 커튼을 열었다. 캄캄한 어둠이 아니라 저녁노을 비슷할 정도로밖에 얼마든지 걸어 다닐 수 있었다(White Night). 반대로 생각하면 12월, 1월은 낮이 없다. 겨우내 춥고, 눈 내리는 어둠 속에 살아야 한다. 다행히 전기요금이 싸 불을 밝히고 난방이 가능하지만 시골은 아직도 갇혀 살아야 한다. 겨울이 되어 남극으로 가면 일 년 내내 밤이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집을 안고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철새들은 겨울을 피해 따뜻한 기후로 갔다가 여름이 오면 다시 찾아오는데 사람들은 혹한의 불모지에서 동면해야 한다. 그런데도 여행 중 아이슬란드의 어둠 속에서 밝음을 보았다. 최복림 / 시인삶의 뜨락에서 나라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 북쪽 나라 이름 적도 관측소

2022-05-20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